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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양은 지향의 반대말이 아니다

필자가 초등학교때 선생님에게서 처음 배운 "지양"이라는 어려운 말의 개념은 "지향"의 반대말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커서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우리나라 언어 정책이 얼마나 잘못 됐나 하는 사실을 다시한번 절감했습니다.

 

"지양"이라는 말이 다소 문어적이고 어렵게 느껴지는 말이다보니 일상 대화 속에서 쉽게 들을 수는 없지만, 대중매체나 소위 "지식인"의 입에서는 종종 나오는 말입니다. 주로 "어떤 말이나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쓰이죠.

 

하지만 이렇게 쓰이는 지양의 용법이 과연 맞을까요? 먼저 사전상 "지향"과 "지양"의 개념을 통해서 어떤 점이 잘못됐는지 짚어보겠습니다.

 

▲ 변증철학으로 유명한 독일 철학자 "헤겔(Hegel)"

 

국립국어원에서 발간한 국어사전에서 "지향"을 찾아보면 아래와 같이 정의를 내려놓았습니다. 이 지향의 원래 한자를 보면 "뜻 지(志), 향할 향(向)"으로서 "어떤 뜻(즉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는 의미를 잘 내포하고 있고 일상 생활에서도 제대로 쓰이고 있습니다.

 

자, 그러면 이 "지향"이라는 말의 반대말은 무엇일까요? 저는 어릴 적에 "지향"과 "지양"이 발음도 아주 비슷해서 아마도 "지"자는 공통의 뜻이고 "향"과 "양"이 반대의 의미가 아닐까 생각했고 나중에 "지양"의 뜻을 제대로 알기 전까지도 막연히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럼 "지양"의 의미를 사전에서는 어떻게 정의할까요? 아래 국립국어원 국어사전의 첫째 풀이를 보면 "더 높은 단계로 오르기 위해 어떠한 것을 하지 아니하다."라고 나옵니다. 결국 무엇을 "하지 아니하다"이니까 일견 "지향"과 반대의 뜻으로 보입니다. 근데 과연 이 풀이와 쓰임새가 맞을까요?

 

 

"지양"은 변증철학에서 온 "정반합"이라는 의미

 

"지양"의 사전상 정의 중 둘째 풀이를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원래 "지양"이라는 한자어는 독일 철학자 헤겔이 집대성한 "변증법"에서 "정반합"의 원리를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철학 용어입니다. 두산백과의 변증법 풀이에 따르면 "정이란 그 자신 속에 실은 암암리에 모순을 포함하고 있음에도 그 모순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는 단계이고, 반이란 그 모순이 자각되어 밖으로 드러나는 단계이며, 이렇게 모순에 부딪침으로써 제3의 합의 단계로 전개해 나간다"라는 의미입니다.

 

즉 지양이라는 말이 변증법의 "정반합" 원리에서 온 만큼 그 의미를 내포하고 있어야하는데 오히려 사전상의 첫째 정의와 일상에서는 그 반대의 의미로 쓰이고 있으니 답답할 노릇입니다. "정반합"은 오히려 어떤 인식이나 사물이 최종 단계("합")에 이르기 위해서는 "정"과 "반"의 단계를 거친다는 다소 어려운 개념이며, 결국 "지향"이라는 말보다 더욱더 차원이 높은 "지향"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어떻게 같은 단어를 설명해 놓은 사전에서 "지양"이라는 말의 의미를 전혀 상반되게 적어놨을까요? 일상생활에서 쓰면 "부정적인 말"이고 철학 수업시간에 쓰면 "긍정적인 말"이 되나요?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오히려 "지향"의 반대말은 "지양"처럼 어려운 말이 아니라 "자제"나 "억제", "피함" 등이 아닐까요? 필자 또한 "지양"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나서부터는 "지향"의 반대말로 "지양"을 쓰지 않게 됐습니다. "지양"의 개념 자체도 어려울 뿐더러 굳이 다른 쉬운 말을 놔두고 잘못된 개념의 말을 "어렵게" 쓸 필요가 없기때문입니다.